제83회 남산을 아십니까
나는 남산을 꽤 괜찮은 산이라고 생각한다. 시내에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산이요, 갔다가도 여의치 않으면 후딱 내려올 수 있는 산이 남산이다. 이 나라에서 그렇게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산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후배나 친구, 여자와 함께 영 마땅히 갈 곳이 떠오르지 않을 때 또는 갑자기 조용한 곳에 앉아 있고 싶어서 “야, 남산이나 가자!”고 하면 그들은 나를 한참 쳐다본다.
“남산?와, 미치겠네....”
갈 곳 없는 노인네들이나 가는 남산을 왜 가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런 대답을 들으면 더 미친다. 남산을 제대로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보나마나 모르고 하는 소리겠지만) 기가 막힐 뿐이다. 남산을 쭈르르 올라갔다가 쭈르르 내려오는 그런 산이 아니다. 제법 규모가 갖춰진 산인데다가 서울 복판에 자리잡았으니 하산을 어느 쪽으로 하느냐에 따라 내려오면서도 즐거운 산이 된다.
겨울을 빼놓고 남산은 언제 가도 부담이 없다. 말마따나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어느 시간대라도 헐렁해서 복닥거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뭐 개포동에 사는 사람이나 인천에 직장을 둔 사람더러 일부러 남산을 찾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남산이 빤히 보이는 동네에 살거나 남산 가까운 곳에 직장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끔 오르라는 것이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83번이나 83-1번(요즘 번호가 바뀌었는데 몇번이 가는지 모르겠다.) 버스를 타고 남산 시립도서관 정류장에서 내리면 서울타워가 버티고 서 있다. 이제 귀찮거나 버스 타기가 애매하면 택시를 타도 요금에 부담이 없다. 종로나 세종로에서 보통 2천원(요즘은 기본 요금도 2천원이 넘는다.) 안팎이니까.
남산은 등산 개념이 통하지 않는 산이다. 배낭 메고 남산 가는 거봤냐. 차가 다니는 길 빼놓고는 정상(팔각정)으로 오르는 모든 길이 계단화되어 있어 쉬엄쉬엄 오르면 아이들도 다리 아프다는 소리를 안한다.
남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국립극장 옆 찻길이 내가 보기에는 가장 경치가 좋은데 나무가 우거지고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이 운치를 더 한다. 연인끼리 호젓하게 오르면 분위기도 잡을 수 있다. 키스는 좀 곤란하고. 이 길로 슬금슬금 오르다보면 오른쪽으로 남산순환도로가 나온다. 여기는 평상시에 차가 다니지 못하게 해 더 조용하다. 길도 평탄해 걷기는 힘들지 않지만 무덤덤해서 재미가 모자라다.
다리 아픈데 미쳤다고 거길 가느냐고 말할 사람은 케이블 카를 타라. 택시 타고 남산 케이블 카 나는데 가자면 다 알고 데려다 준다. 거리서 편도만 끊든지 왕복을 끊고 타면 서울타워 바로 밑까지 올라간다. 어떤 사람은 남간 가면 부득부득 서울타워에 올라가자고 하는데 남산을 망친 괴물이야말로 이 거대한 탑이다. 또 올라가봐야 볼 것도 없다. 맑은 날이면 인천 바다가 보인다는데 보이긴 개코도 안 보인다. 스모그가 두껍게 깔린 서울 하늘 밑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셈이다. 그걸 몇 천원씩 주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난 희한하다. 남산에 올라가서 뭘 먹을 생각은 안 하는게 낫다. 음료수나 맥주 한 잔 정도라면 몰라도 밥은 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