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해 여름, 강남의 어느 아파트촌에서 밤에도 매미가 극성스럽게 울어 잠을 못 잔다는 뉴스가 있었다. 매미가 얼마나 많았으면 무더운 여름 시원함마저 느끼게 하는 그 소리에 잠을 제대로 못 잤을까.
대도시에 사는 우리는 온갖 소음에 시달려 이제 웬만한 소리에는 만성이 되어 있다시피 하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듣지 않으려고 별수없이 너도나도 카세트 이어폰이라도 귀에 꽂고 다녀야 하는 형편이다. 내가 아는 어떤 놈은 이걸 하도 크게 틀고 다니다가 귀가 어떻게 되었다면서 징코민을 먹고 다니기도 했다. 근데 징코민이 귀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에서부터 버스기사가 제멋대로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 시도때도 없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삐삐 소리, 돈바구니를 들고 지나가면서 찬송가를 늘어지게 부르는 맹인의 노랫소리, 소형 트럭에 야채와 생선을 싣고 동네 구석구석 누비며 “친애하는 애국 시민 여러분...” 어쩌구 하는 행상의 녹음기 소리. 잠 좀 잘라치면 들려오는 이웃집 애 우는 소리. “죽여라 죽여!” 악쓰는 소리,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 등등 일일이 신경 쓰고 살다 보면 돌아버린다.
온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다 보니 더러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가지려 해도 여
의치가 않다. 귓구명에 솜 틀어먹고 사색에 빠지겠달수도 없지 않는가.
이럴 땐, 비 오는 날 고궁에 가 보자. 비 쏟아지는데 거긴 뭐하려 가느냐고? 누가 장마철에 가라고 그랬냐. 이슬비나 가랑비가 부슬부슬 또는 추적추적 내리는 날 시간내서 가 보자는 얘기다.
혼자 가는 게 좋다. 둘이 가면 잡담이 많아지니 사색이고 나발이고 아무 소득이 없어진다.
비 오는 날 고궁에 가면 사람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평일이라면 고즈넉하기가 이를 데 없어 겁이 많은 사람은 좀 으시시할 정도다. 조용하기는 말할 것도 없고 사방이 괴괴하여 우산 접고 추녀 밑에 앉아서 떨어지는 낙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노라면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와 있는가. 내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하는 거창한 철학적 명제가 저절로 떠오른다.
이런 사색이 내키지 않는 사람은 그냥 멍하니 있다 와도 그만이다. 고요 속의 빗소리를 즐기면서 잎새에 튀는 물방울도 바라보고 연못에 무수히 그려지는 동심원을 마냥 바라보고 어슬렁어슬렁 거닐다 와도 누가 뭐랄 사람 없다.
그렇지만 시청 앞에 있는 덕수궁은 갈 만한 곳이 못 된다. 워낙 도심지에 있어 항상 사람이 들끓는데다가 (이곳은 천둥 번개가 치는 날에도 사람이 많다) 궁의 규모가 작고, 석조전이 자리잡고 있어 고색창연한 맛이 없다. 그러니 덕수궁엔 가나마나다.
고궁 중에는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고 울창한 수림이 있는 비원까지 안고 있는 창덕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궁궐이지만 이곳은 문화재를 보호한답시고 안내원이 정해진 시간마다 관람객을 우르르 데리고 다니는 바람에 한 시간 남짓이면 거리로 쫓겨난다.
조용하고 사람 없기로는 종로 4가 세운상가 맞은편에 있는 종묘가 최고다.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이 궁은 일반 궁과는 달리 제사만 지내는 그 특수성에 따라 아기자기한 맛은 없어도 숲이 우거져 있고 일반일들의 발길이 뜸해 비가 오지 않는 날이라도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여기의 명칭이 `묘`라서 아무래도 썰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창경궁으로 넘어가자. 종묘와 창경궁은 육교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입장료는 한군데에서만 내면 된다. 창경궁은 창경원에서 궁으로 바뀐지 얼마 되지 않는다. 복원 사업으로 궁 전체가 새로 지은 것 같아 정취는 떨어지나 그런대로 괜찮다.
비와 함께 정적을 즐기기에 가장 무난한 궁궐은 경복궁이다. 넓다란 경회루 연못의 잉어에게 과자 던져주는 재미도 그럴 듯하고 향원정의 연꽃을 바라보며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벗삼아 고독을 씹어 보기에도 적당한 궁이다.
그런데 이 경복궁은 바로 옆에 청와대 경비대가 있어 느닷없이 기합 소리가 내질러지기도 하니 놀라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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