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일이 꼬일 때 노인네들이 내뱉는 푸념이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현생에 그 죄를 갚느라고 되는 일이 없다는 해석이다. 요즘 전생 타령이 늘고 있다. 책도 꽤 나와 있고 전생을 이야기하는 노래도 유행하는 모양이다. 나의 전생은 어땠을까?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누구나 호기심이 가는 질문이다.
나는 간혹 가다가 뜬금없는 꿈을 꾸는데,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죽거나(옛날에), 아니면 총에 맞아 죽는다(현대에). 재수없는 꿈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런 날 아침이면 '이거 내가 전생에 곱게 죽진 않은 개벼!' 하는 생각을 한다. 전생의 그 극적인 죽음이 지금 꿈 속에서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야.
전생은 정말 있을까?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나고 죽기를 거듭한다는 윤회를 주장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전에는 누구도 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설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누구나 수천 수만 번의 윤회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게 된 셈이다. 지금의 세상에서 부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다음 생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한 정신과 의사는 최면 상태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무의식 속의 한 장면일 뿐이지 그게 진짜 전생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게 전생인지 아닌지 누가 증명할 것이냐는 말이다. 최면으로 전생을 추적하는 실험은 서구에서 이미 입증된 바 있다. 퇴행 최면
을 통해 전생의 전생까지 들어갔는데 대상자가 일러준 마을과 당시의 이름을 추적해 본 결과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면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전생을 마치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술술 얘기했는데 확인해 보니 맞더라는 얘기다.
그럼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전생이 있다는 건가?
전생이 있거나 말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전생에 왕이었으면 어떻고 개였으면 어떠랴. 공주였으면 또 무엇 하는가. 중요한 건 지금의 나다. 지금의 나를 왕으로 만드는 것도 나요 개로 만드는 것도 나다. 전생이 있다면 후생도 있을 것이니 후생에서 부끄럽지 않은 현생의 나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전생에 관심을 쏟는 까닭은 지금이 세기말이기 때문일것이다. 무엇이든 확실해 보이는 것이 없고 가치 판단이 흐려지는 세상에 살다 보니 죽음 이후의 세계, 전생, UFO 등에 필요이상의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신비주의에 빠짐으로써 잠시나마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심리의 산물이다.
전생에 관심 갖지 말고 후생을 위해 살자. 전생에서 바르게 살면 후생이 즐겁고 아름답다 한다. 추하게 살면 후생에서 개나 소로 다시 나고, 맑게 살다 가면 선남선녀로 태어나 근심 걱정 없이 산다는데....
어이구 이놈의 전생, 살기가 여간 까다로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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